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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경

부상(扶桑)은 반얀나무다?

부상(扶桑)

 부상(扶桑)은 해가 뜨는 동방에 있다고 하는 신성한 뽕나무를 말한다.

 산해경에 기록하기를 부상(扶桑)의 가지에는 열 개의 태양이 달려있고, 태양은 함지(咸池)에서 목욕하고 탕곡(暘谷)에서 돋아 부상(扶桑)의 꼭데기 위로 솟아오른다고 하였다. 한 개의 태양이 오면, 한 개의 태양이 나가는데 태양새가 해를 운반한다.


 [인용문]


 산해경 해외동경

  "《山海經 海外東經》: 下有湯谷. 湯谷上有扶桑, 十日所浴, 在黑齒北. 居 水中, 有 大木, 九日居下枝, 一日居上枝 " 

 " (해외동경) 아래에 탕곡이 있다. (탕곡은) 열 개의 태양이 목욕하는 곳으로 흑치의 북쪽에 있다. 물속에 큰 나무가 있어 아홉 개의 태양은 아래 가지에 있고, 한 개의 태양은 윗가지에 있다."

 "《山海經 大荒東經》: 湯谷上有扶木. 一日方至, 一日方出, 皆載于烏 "

 " 탕곡 위에 부목이 있다. 한 개의 태양이 오면, 한 개의 태양이 나간다. 까마귀가 해를 운반한다 "


 곽박의 주석: 扶桑 木也 / 부상(扶桑)은 나무다.


 십주기(十洲記) / 동방삭(東方朔) 

 " ... 扶桑在東海之東岸,岸直,陸行登岸一萬里,東復有碧海。海廣狹浩?,與東海等。水?不鹹苦,正作碧色,甘香味美。扶桑在碧海之中,地方万里,上有太帝宮,太?東王父所治處。地多林木,葉皆如桑。又有?樹,長數千丈,大二千余圍。樹兩兩同根偶生,更相依倚,是以名?扶桑。仙人食其?,一?皆作金光色,飛翔空立。其樹雖大,其葉?故如中夏之桑也。但?稀而葉赤,九千歲一生實耳。"

 " 부상은 동쪽 바다 앞 언덕에 우뚝서 있는 나무이다. 육지에서 그 기슭에 오르르면 일 만리를 가야 한다. 동해와 같이 동쪽에서 물이 들어왔다 나가는데 물살이 크고 거칠며 무서운 파도가 친다. 물은 원래부터 짜거나 쓰지 않고, 푸른 정색에 맛이 감미롭다. 부상은 동해의 바다 가운데 있으며 그 넓이가 만리이다. 위에는 태제궁이 있고 태진동왕부가 다스리는 곳이 있다. 그 땅의 숲에는 부상나무가 많다. 잎은 뽕나무와 비슷하고 길이와 그 수가 천장(千丈 : 1丈은 10尺)이며, 둘레가 스무 아름인데 양쪽 모두에 뿌리가 함께 뻗어나 있고 서로 뿌리에 의지하고 있다. 부상(扶桑)이라고 하며 선인들이 '오디'를 먹고 산다. 모두 금빛으로 치장하고 공중을 날아 다닌다. 비록 나무가 크기는 하지만 오래 전부터 여름이면 잎과 '오디'가 영근다. 오디와 잎이 붉은색으로 열리면 구 천 년에 한번 열린 것이다. "

 

 

 

[인용문]


梁書
양서

卷五十四 列傳 第四十八 諸夷
제오십사 열전  제사십팔 제이

唐 姚思廉 等
당  요사렴 등

상략

東夷諸戎
동이제융  

東夷之國,朝鮮爲大,得箕子之化,其器物猶有禮樂雲。魏時,朝鮮以東馬韓、辰韓之屬,世通中國。自晉過江,泛海東使,有高句驪、百濟,而宋、齊間常通職貢。梁興,又有加焉。扶桑國,在昔未聞也。普通中,有道人稱自彼而至,其言元本尤悉,故?錄焉。

東夷의 [여러] 나라 중에서 朝鮮이 제일 강대하였는데, 箕子의 교화를 입어 그 文物이 禮樂에 합당하였다고 한다.

魏나라 때는 조선 동쪽의 馬韓·辰韓 등이 대대로 중국과 왕래하였다. 晋나라가 揚子江을 건너 간 후부터 바다를 건너온 동방의 사신으로는 高句驪·百濟 등이 있었는데, 宋·齊 시대에도 항시 직공(職貢)하였으며 梁나라가 흥기하자 더욱 빈번히 내왕하였다.

扶桑國이란 옛날에는 듣지 못하던 나라이다. 普通 연간(A.D.520~526; 高句麗 安藏王 2~8)에 그곳에서 왔다는 道人이 있었는데, 그의 말이 사리에 매우 합당하므로 함께 기록한다.

중략

文身國
문신국 
 

文身國,在倭國東北七千餘里。人體有文如獸,其額上有三文,文直者貴,文小者賤。土俗歡樂,物豊而賤,行客不齎糧。有屋宇,無城郭。其王所居,飾以金銀珍麗。繞屋爲?,廣一丈,實以水銀,雨則流于水銀之上。市用珍寶。犯輕罪者則鞭杖;犯死罪則置猛獸食之,有枉則猛獸避而不食,經宿則赦之。

'문신국'은 '왜'의 동북쪽 칠천여리에 있다. 사람들은 몸에 문신이 있어 마치 짐승 처럼 보인다. 그 이마 위에 세 개의 무늬가 있는데, 무늬가 곧은 것은 귀한 것이고, 무늬가 작은 것은 천한 것이다. 풍속에 음악을 좋아하고 물건이 풍부하여, 값이 싸서, 길을 가는 사람들도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집은 있는데, 성곽은 없다. 나라의 왕이 거하는 곳은 금은과 보배로써 곱게 꾸미는데, 집을 둘러싸면서 도랑을 파는데, 넓이가 일장이나 되며, 수은을 채워 넣어, 비가 오면 곧 수은 위로 흘러 간다. 저자거리에서 보배를 판다. 죄가 가벼운자는 매질을 하고, 죽을 죄를 범하면, 곧 맹수의 먹이로 주는데, 하늘의 보살핌이 있으면, 동물이 피하여 먹지 않아 하루를 지나면, 곧 용서한다.

大漢國
대한국
  

大漢國,在文身國東五千餘里。無兵戈,不攻戰。風俗?與文身國同而言語異。

'대한국'은 '문신국'의 동쪽 오천여리에 있다. 병사들과 전쟁이 없어, 공격하지 않는다. 풍속은 '문신국'과 같으나, 언어는 다르다.


扶桑國
부상국
  

扶桑國者,齊永元元年,其國有沙門慧深來至荊州,說云:「扶桑在大漢國東二萬餘里,地在中國之東,其土多扶桑木,故以爲名。」扶桑葉似桐,而初生如筍,國人食之,實如梨而赤,績其皮爲布以爲衣,亦以爲綿。作板屋,無城郭。有文字,以扶桑皮爲紙。無兵甲,不攻戰。其國法,有南北獄。若犯輕者入南獄,重罪者入北獄。有赦則赦南獄,不赦北獄。在北獄者,男女相配,生男八歲爲奴,生女九歲爲婢。犯罪之身,至死不出。貴人有罪,國乃大會,坐罪人于坑,對之宴?,分訣若死別焉。以灰繞之,其一重則一身?退,二重則及子孫,三重則及七世。名國王爲乙祁;貴人第一者爲大對盧,第二者爲小對盧,第三者爲納?沙。國王行有鼓角導從。其衣色隨年改易,甲乙年?,丙丁年赤,戊己年黃,庚辛年白,壬癸年黑。有牛角甚長,以角載物,至勝二十斛。車有馬車、牛車、鹿車。國人養鹿,如中國畜牛,以乳爲酪。有桑梨,經年不壞。多蒲桃。其地無鐵有銅,不貴金銀。市無租?。其婚姻,?往女家門外作屋,晨夕灑掃,經年而女不悅,?驅之,相悅乃成婚。婚禮大抵與中國同。親喪,七日不食;祖父母喪,五日不食;兄弟伯叔姑?妹,三日不食。設靈爲神像,朝夕拜奠,不制??。嗣王立,三年不視國事。其俗舊無佛法,宋大明二年,?賓國嘗有比丘五人遊行至其國,流通佛法、經像,?令出家,風俗遂改。                                   

'부상국'은 제나라 영년 원년에 그 나라 중 혜심(慧深)이 형주(荊州)로 와서 말하길 부상은 '대한국'의 동쪽 2만 여리에 있으며, 중국의 동쪽에 있다. 땅에 부상나무가 많아 고로 이름을 삼았다. 부상의 잎은 오동나무와 같고, 잎이 처음 나올 때는 죽순과 같아, 나라 사람들이 이를 먹는다. 열매는 오얏과 같고 색이 붉다. 그 껍질에서 실을 뽑아 베를 만들어 옷을 짓는데, 또한 비단이다. 판잣집을 짓고, 성곽은 없다. 문자가 있는데, 부상나무 껍질로 종이를 만든다. 병사와 무기가 없어,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 그 나라의 법에 남북에 감옥이 있는데, 만약 죄를 범하여, 가벼운 죄는 남쪽 옥에 넣고, 무거운 죄는 북쪽 옥에 넣는다. 사면할 때는 곧 남쪽 옥에서 놓아주는데, 북쪽 옥에는 방면하지 않는다. 북쪽 옥에 있는 자는 남녀를 짝지워 주는데, 남자아이를 낳으면 팔세에 노예로 삼고, 여자 아이를 낳으면, 구세에 계집종으로 삼는다. 죄를 범한 몸은 죽을 때 까지 나올 수 없다. 귀한자가 죄를 지으면, 나라 사람들이 큰 모임을 열어서 죄인을 앉혀서 구덩이에 묻는데, 연회를 열어 헤어진다고, 대답하고 만일 죽으면 이에 이별하게 되는 것이다. 재로 만들어 여기에 두른다. 그 첫 번째 중한 것은 몸 하나로 마치고, 두 번째는 자손에 미치고, 세 번째는 칠대에 이른다. 나라의 을 을기(乙祁)라 부르며, 귀인중 제일자를 대대로(大對盧), 이자를 소대로(小對盧), 삼자를 납돌사(納?沙)라 한다. 나라의 왕이 길을 가면 북을 치고, 뿔피리를 불면서 따른다. 옷의 색깔은 해마다 바꾸는데, 갑을년에는 청색, 병정년에는 적색, 무기년에는 황색, 경신년에는 백색, 임계년에는 흑색이다. 소뿔이 매우 길어서 뿔에다 물건을 매다는데 이십되나 실을 수 있다. 수레에는 말 수레, 소 수레, 사슴 수레가 있다. 나라 사람들은 사슴을 기르는데, 생김새가 중원에서 키우는 소 같다. 젖을 짜서 식초(발효유)를 만든다. 역시 배나무가 있는데, 해마다 무너지지 않는다. 포도가 많다. 그 땅에는 철이 나지 않고 구리가 난다, 금과 은은 귀하지 않다. 시장에는 세금을 매기지 않는다. 그 혼인하는 법에 사위되는 사람이 여자집에 가서 문밖에 집을 짓고, 새벽과 저녁으로 청소하는데, 그 해에 여자가 좋아하지 않으면 돌아 오고 서로 좋아하면 결혼하게 된다. 혼인하는 예는 대계 중국과 같다. 친 부모가 상을 당하면 칠일간 먹지 않고, 조부모가 상을 당하면 오일간 먹지 않고, 형제와 삼촌 사촌과 누이가 상을 당하면 삼일간 먹지 않고, 신상을 만들어 아침 저녁으로 절하고 제사하는데, 애질(머리에 쓰는것)은 하지 않는다. 이전 임금을 이어 새 임금이 되면 삼년 동안 친히 나라일을 돌보지 않는다. 그 풍속에 옛 부터 불법이 없다. '송''대명'2년 '계빈국'에서 비구 다섯명이 나라에 와서 불법과 불상을 퍼뜨리니 가르침을 받아 출가하게 되어 마침내 풍속이 바뀌었다. 

慧深又云:「扶桑東千餘里有女國,容貌端正,色甚潔白,身體有毛,發長委地。至二、三月,競入水則任娠,六七月?子。女人胸前無乳,項後生毛,根白,毛中有汁,以乳子,一百日能行,三四年則成人矣。見人驚避,偏畏丈夫。食鹹草如禽獸。鹹草葉似邪蒿,而氣香味鹹。」天監六年,有晉安人渡海,爲風所飄至一島,登岸,有人居止。女則如中國,而言語不可曉;男則人身而狗頭,其聲如吠。其食有小豆,其衣如布。築土爲牆,其形圓,其戶如竇云。

혜심이 또 말하기를 부상의 동쪽 천 여리에 여자들의 나라가 있는데, 얼굴이 곧고, 색깔은 깨끗한 백색이고, 몸에 털이 있으며, 머리칼이 길어 땅까지 이른다. 이 삼 월달에 이르러, 앞다퉈 물에 뛰어 든다 그러면 곧 아이를 베고, 육칠월에 아이를 낳는다. 여자들은 앞 가슴에 젖이 없고, 목뒤에 털이 있어 뿌리는 하얗다. 털 가운데에 즙이 있어 아이에게 젓을 먹인다. 백일이면 능히 걸을 수 있고, 삼사년이면 성인이 된다. 사람을 보면 놀라서 피하는데, 특히 장부를 두려워한다. 동물 처럼 쓴 풀을 먹는다. 쓴 풀의 잎은 사호와 같은데, 향과 맛이 쓰다. '양''천감' 육년 '진안'사람이 바다를 건너왔는데, 회오리 바람이 불어 한 섬에 도착해서, 해안에 올라와 사람들이 거하였는데, 여자는 '중국'과 같았고, 언어는 가히 깨달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사람의 몸에 개의 머리를 하고 있고, 그 소리는 짓는 것과 같다. 음식에 작은 콩이 있고, 옷은 베와 같다. 흙은 쌓아 경계를 만들고, 그 형태는 둥근데, 문은 구멍과 같다.

[인용문 끝]

 

 첫번째 기록에서 보통(普通)은 양(梁)나라 무제(武帝)의 두 번째 연호이다. 년도는 AD. 520년경, 부상국(扶桑國)을 다녀 왔다는 도인(道人)이 여러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었는데 그의 말이 사리에 매우 합당하므로 역사서를 편찬하면서 함께 기록한 것이고, 두번째 기록인 부상국(扶桑國) 열전은 제(齊)나라 영원 원년 AD. 499년 승려 혜심이 포교를 떠난지 40년만에 돌아와서 당황제에게 보고한 것이다. 그 내용이 부상국(扶桑國) 열전 본문에 기록되어있는데 송(宋) 대명(大明) 2년(AD.458년) 승려 혜심(慧深)이 계빈국의 비구 다섯 명과 함께 부상국에 가서 불교를 포교하다가 40년이 지난 499년 돌아왔다는 기록이다.

 도인(道人)과 혜심(慧深), 이 두가지의 기록은 같은 사건이 아니라 별도의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년대가 20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으로 비슷하기는 하나 역사가의 붓끝으로 분명히 양(梁)나라 무제(武帝)때와 제(齊)나라 영원 원년으로 구분하였기 때문에 전자는 왕에게 보고되지 않은 사실을 간략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으로 보아 한때 많은 인사들이 부상국(扶桑國)으로 가는 일에 도전했고 그중 일부가 되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이미 부상국으로 가는 루트가 어느 정도 알려진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미 발해의 고래잡이 선원들의 입에서 부터 전해져 내륙으로 퍼졌던 부상국의 존재는 혜심(慧深)이라는 승려가 실재로 부상국에 갔다가 40년 만에 돌아왔으므로 발해 사람들은 막연하게만 생각 되었던 부상국(扶桑國)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고 마침내 AD.926년 발해 민족 대이동이라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본문에서 눈여겨 보아야할 구절이 하나있다.

 나라의 왕을 을기(乙祁)라 부르며, 귀인중 제일자를 대대로(大對盧), 이자를 소대로(小對盧), 삼자를 납돌사(納?沙)라 한다. "

 그냥 듣고있으면 고구려의 관직을 말하는것 같지 않은가?

 대대로(大對盧)는 고구려 12관등(官等) 중의 최고 관직으로 오늘날의 수상직이고, 소대로(小對盧)를 보면 웃음이 나온다. 대대로(大對盧) 보다 한격이 낮은 계급인데 한자어의 크다는 개념 大와 작다는 뜻의 小를 사용하고 있으니 이것은 분명히 고구려 사람이 만든 계급제도인 것이다.

 그러면 납돌사(納?沙)도 한자식으로 지어진 것이 아닐까? 대대로(大對盧), 소대로(小對盧)는 왕족을 뜻하는것 같고 납돌사(納?沙)는 물건이나 세금 등을 출납 또는 관리하고 일종의 치안도 담당하는 관직으로 보인다.

 A D. 499년과 AD. 520년은 고구려 때이므로 발해 사람들이 부상국을 찾아 아메리카로 건너가기 전에 먼저 고구려인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 옛날 해가 뜨는 곳을 확인하기 위해 동방으로 향한 사람이 제법 많았던 것 같다. 사서의 기록에 보면 나름대로 부상과 탕곡에 대해 기록한 것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서불(徐福)이다. 연나라 제나라의 일이 있은 후 꾸준히 부상국으로 향한 행렬이 이어졌다. 그것은 고구려, 발해인들이 부상국으로 대거 이동한 증거가 발견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손성태박사께서 많이 연구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인용문]  

  

사마 천(司馬 遷) /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

 自威宣燕昭, 使人入海, 求蓬萊方丈瀛州. 此三神山者, 其傳在渤海中, 去人不遠, 患且至, 則船風引而去. 盖嘗有至者 諸僊人及不死之藥皆在焉. 其物禽獸盡白而黃金銀爲宮闕. 未至望之如雲, 及到三神山反居水下. 臨之風輒引去, 終莫能至云. 世主莫不甘心焉. 及至秦始皇幷天下, 至海上, 則方士言之不可勝數. 始皇自以爲至海上而恐不及矣, 使人乃齎童男女入海求之. 船交海中, 皆以風爲解, 曰未能至, 望見之焉. 其明年, 始皇復游海上, 至琅邪, 過恒山, 從上黨歸. 後三年, 游碣石, 考人海方士, 從上郡歸. 後五年, 始皇南至湘山, 遂登會稽, ?海上, 冀遇海中三神山之奇藥. 不得, 還至沙丘崩.

 제나라의 위왕과 선왕, 연나라의 소왕(昭王) 이래로 사람을 바다로 파견하여 봉래, 방장, 영주(蓬萊, 方丈, 瀛洲)를 찾도록 하는 일이 잦아졌다.

 

 전설에 의하면, 이 삼신산(三神山)은 발해(渤海) 중에 있어 그 길이 멀지 않았으나, 선인(仙人)들은 배가 도착하는 것을 걱정하여 곧 바람을 일으켜 배를 멀리 보냈다고 전해진다.

 이미 그곳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선인들과 장생불사의 약이 모두 거기에 있으며, 산 위의 물체, 새, 짐승 등의 색깔은 모두 흰색이며, 궁전은 모두 황금과 백은(白銀)으로 건축하였다고 전한다.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않았을 때 멀리서 바다라 보면, 삼신산은 천상의 백운과 같으며, 거기에 도달하여 보면 삼신산은 오히려 수면 아래에 처해 있는 듯하다. 배가 막 다다르려고 하면 바람이 배를 밀쳐내어 시종 거기에 도달할 수 없었다. 속세의 제왕 중 그곳을 흠모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진 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 방사들이 해상 신선 전설에 관하여 말하는 횟수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진 시황은 친히 해상으로 나아갔다가 삼신산에 도달하지 못할까 두려워,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해상으로 나아가 이 삼신산을 찾도록 사람들을 파견하였다. 배가 해상에서 돌아와서 바람을 만나 도달할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서, 비록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삼신산을 확실히 보았다고 말하였다.

 2년째, 진 시황은 다시 해상을 순유하며 낭야산(琅邪山)에 도달하고, 항산(恒山)을 거쳐 상당(上?)으로부터 되돌아왔다. 그로부터 5년 후, 진 시황은 남쪽으로는 상산(湘山)까지 순유하고, 회계산(會稽山)에 올라 해상으로 가서 삼신산의 장생불사약을 얻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얻지 못하고 귀경하는 도중에 사구(沙丘)에서 죽었다. (출판사 : 까치, p.192-193)


  갈홍(葛洪) / 신선전(神仙傳)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에서 발췌한 상전벽해(桑田碧海) 

 " 麻姑 謂王方平曰 自接待以來 見東海三變爲桑田 向到蓬萊 水乃淺於往者略半也. 豈復爲陵乎"

 " 王方平 曰 東海 行復揚塵耳. "

 " 마고(麻姑)가 왕방평(王方平)에게 말했다. 곁에서 모신 이래 저는 동해가 세번이나 뽕나무밭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번에 봉래(蓬萊)에 갔더니 바다가 다시 얕아져서 이전의 반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또 언덕이 되려는 것일까요? "

 " 왕방평이 대답했다. 동해가 다시 흙 먼지를 일으킬 뿐이네."

 

  [인용문 끝]

 갈홍(葛洪)은 동진(東晉)시대의 도가(道家)이며 호는 포박자(抱朴子)이다. 신선의 도를 닦으면 천지와 수명을 같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저서는 포박자(抱朴子, 내편 20권, 외편 20권), 신선전(神仙傳, 10권) 등이 있다. 

 갈홍(葛洪, 283~343)이 살았던 시기는 많은 사람들이 신선도(神仙道)와 연단(鍊丹) . 태식(胎息) . 방중술(房中術)등을 주장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도교(道敎)를 믿지 않고 오히려 그 폐단이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지만 갈홍(葛洪, 283~343)이 살았던 시기는 도교(道敎)를 숭상하는 사람이 불교(佛敎)보다 더 많았던 시대이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고구려 신라 유적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와 풍납토성 경당지구, 경주 기린총(천마총), 기타 적석목곽분 등에서 다량의 운모(雲母)가 발견되는 것은 도교(道敎)와 관련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은 그 것이 불교유적이라고 주장한다. 

 운모(雲母)는 포박자(抱朴子) 내편 제11 선약(仙藥) 편에서 상약(上藥)으로 분류하고 있다.

 

 "운모에는 5종류가 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잘 분별하지 못한다. 5색을 두루 갖추면서도 청색이 많은 것을 운영(雲英)이라 하는데, 이는 봄에 복용해야 한다. 5색을 두루 갖추면서도 적색이 많은 것을 운주(雲珠)라 하니, 이는 여름에 복용한다. 5색을 두루 갖추면서도 백색이 많은 것을 운액(雲液)이라 하며 이는 가을에 복용한다. 5색을 두루 갖추면서도 흑색이 많은 것을 운모(雲母)라 하니 이는 겨울에 복용한다. 청색과 황색이 도는 것은 운사(雲沙)라 하며 이는 초여름에 복용한다. 색깔이 아주 흰 것은 인석(인<麟에서 鹿 대신 石>石)이라 한다. 운모를 적절한 계절에 제대로 만들어 "1년을 복용하면 온갖 병이 물러나며, 3년을 복용하면 늙은이도 어린아이처럼 돌아오며, 5년 동안 (복용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능히 귀신도 부리게 되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으며 물에 들어가도 옷이 젖지 않고, 가시밭을 걸어도 피부가 상하지 않으며, 선인(仙人.신선)을 만날 수 있으며ㆍㆍㆍ10년을 복용하면ㆍㆍㆍ자연(自然)을 다스린다" (번역 : 연합뉴스 김태식)

 진 시황이 도사(道師)의 말만 듣고 수은을 복용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지만 당시 도교(道敎)는 황제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는 위대한 사상이었다.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해서 그런 내용이 실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그럼 이 이야기의 비밀을 더 파헤쳐 보기로 한다.


 봉선서(封禪書)에 기록하기를 발해(渤海)는 삼신산이 있는 곳이라 하였고 봉래(蓬萊), 영주(瀛州), 방장(方丈)등 세개의 산이 있는 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신선전(神仙傳)에는 상전벽해(桑田碧海)로 인하여 봉래(蓬萊)가 물에 잠겼다고 말한다.

 그렇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뽕나무밭이 바다로 변했다는 것인데, 바로 발해(渤海)가 수몰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부상(扶桑)이 있는 곳은, 발해(渤海)의 해중(海中)이고 그 해중(海中)에 삼신산(三神山)이 있으며 삼신산(三神山)은 봉래(蓬萊), 영주(瀛州), 방장(方丈)을 일컫는 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사마천은 삼신산(三神山)은 발해(渤海) 중에 있어 그 길이 멀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선인(仙人)들이 바람을 일으켜 배를 멀리 보냈다고 하였다. 이것은 십주기(十州記)에서 기록한 " 물살이 크고 거칠며 무서운 파도가 친다. "한 것과 일치한다. 

 발해는 원래 '뻘밭'을 뜻하는 싯담어이다. 동국정운에 기록한 발(渤)자의 정확한 발음은 '뻘'이다. 즉, 갯뻘을 말한다. 또한 싯담어 사전에는 대평원의 뜻도 있다.   

 * 발(渤)[] 동국정운 2:29
 * va-ra 산스크리트 : 뻘, 갯벌, 안개 자욱할. 
(강상원, 漢字는 東夷族 文字 註釋 . 한자는 동이족 문자 주석 193쪽) 

 va-ra(빠라)는 바다라는 뜻이다. 안개가 자욱한 뻘밭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해변을 말하며 벌(伐)이라는 명사로 사용될 때 평야, 대평원의 뜻도 된다. (비교 : 황산벌, 서라벌, 셔벌 등) 

 박달이라 하는 것도 발해와 같은 뜻이다. 산스크리트 밝,박,발(渤)은 va-ra : 바다, 갯뻘의 뜻이고, 달(dhar)은 땅(따.地)을 의미한다. 발해(渤海)의 海는 땅과 같은 의미로 쓰였으나 나중에 수몰되어 바다가 되었으므로 발해(渤海)라 하였다.

 흔히, 배달(倍達)을 밝달이라 하고 박달이라고도 하는데, 지명을 말할 때는 발해(渤海)라 하고, 민족을 말할 때는 배달(倍達)이라 한다. 박달나무는 배달(倍達)을 상징하는 나무를 말하며 이를 웅상(雄常)이라 한다.

 배달(倍達)은 산스크리트 pyaina-tal(뻬야이나 따) : 빼여나게 태어난, (천부적)하늘이 내린, 초월적인의 뜻이 있고, veda-artha(베다 아르 따), "지혜에 통철한 민족"이라는 뜻이다. (강상원, 漢字는 東夷族 文字 註釋 . 한자는 동이족 문자 주석 190쪽) 

 발해의 원래 뜻이 밝혀진 만큼 고대의 기록들에서 숨겨진 사실들을 잘 해석하면 잃어버린 발해의 강역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옛날 발해(渤海)는, 넓은 평원에 있었던 대동이(大東夷)의 거주지 였다가 약 5천 년 전부터 서서히 뻘로 변해갔으며, 그래도 봉래(蓬萊), 영주(瀛州), 방장(方丈) 등은 높은 지대였으므로 육지가 섬으로 변할 때까지 별 위험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후 육지에서 섬으로 변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신비한 신선들의 세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훗날 단군께서 이곳에 도읍을 정했으나 곧 대홍수를 맞게 되었다. 발해가 결정적으로 물에 잠기게 된 것은 단군조선이 개국한지 37년(甲辰年)이 되던 해에 일어났던 대홍수 때문이었다. 

 그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규원사화(揆園史話) / 단군기(檀君紀) 발췌

" ... 御國三十餘年, 正値洪水, 浩波溜天, 懷襄遼滿之(時)[野], 浿水漲溢平壤沈潛. 乃遣四子, 遍相土地之宜, 占居阿斯達下唐莊之野, 今文化.九月山下, 有莊莊坪, 卽其地也. "

" ...나라를 다스린지 30여 년만에 홍수를 만났는데, 어마어마한 파도는 하늘까지 치솟아 요만(遼滿)의 들녘을 품으며 올라서니 패수의 물은 불어 넘치고 평양은 물에 잠겨 버렸다. 이에 네 아들을 보내 마땅한 땅을 두루 살피게 하고는 아사달(阿斯達) 아래 당장(唐莊)의 들녘을 차지하여 거처케 하였는데, 지금의 문화(文化) 구월산(九月山) 아래 장장평(莊莊坪)이 있으니 바로 그 땅이다. "


 제왕년대력(帝王年代歷) / 단군기(檀君紀) 발췌


 " 甲辰, 移都于唐莊京 命肅愼氏 任征伐 鳳凰止于庭 今文化縣.莊莊坪也. 時洪水汎濫, 沈沒平壤, 使王子登阿斯達山而定之 "

 " 갑진년에 도읍을 당장경으로 옮겼다. 숙신씨에게 명하여 정벌의 일을 일임하였다. 봉황이 뜰에 머물렀다. 지금의 문화현 장장평을 말한다. 이 때 홍수가 범람하여 평양이 침몰되었기에, 왕자를 시켜 아사달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새로운 거처를 정하게 한 것이다. "

 이때는 단군이 나라를 다스린지 37년(甲辰年)이었다.

 한 때 단국조선의 도읍지인 '평양(平壤)'은 지금의 요동반도 '대련(大連)'시 앞 바다에 있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에는 이곳이 바다가 아닌 대평원지대 였다. 그러므로 평양(平壤)이라한 것이다. 평양(平壤)이 차츰 물이 차올라서 단군이 나라를 다스린지 36년(bc2297 갑진년)에 대홍수를 만나 수도인 평양(平壤)이 침수되었고, 그로부터 13년 후(bc2284 정사년)에 도읍을 당장경(唐莊京)으로 옮겼다는 기록이다. 

 제왕년대력(帝王年代歷)은 학자들이 위서라고 취급했지만 단군시대에 있었던 대홍수에 대해서 규원사화(揆園史話)보다도 더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주 놀라운 사실이다.

 


 발해(渤海)는 1만 2천 년전 육지였다가 북극의 빙하가 급격히 녹으면서 전세계 해수면이 상승하므로 서서히 물이 채워진 곳이다. 지금 황해의 평균 해수면은 약 70M(미터)이다. 그 옛날 해수면이 약 5천 년 동안 평균 70~80M(미터)가량 상승했으므로 발해만은 오랫동안 물에 잠기지 않았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발해만의 평균 수심은 18M(미터)이다. 섬 주위의 수면이 낮은 곳은 겨우 4M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

 저 멀리 제주도에서부터 서서히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여 황해가 형성되었다고 본다면 북극 빙하가 녹기 시작하여 세계 평균 수심이 80M(미터)까지 상승하여도 발해만은 대평원이었으며 바닷가에서 부상나무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20M(미터)의 물이 차오르는 시기는 약 5천 년 전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 시기는 신시(神市) 환웅시대 말기와 단군시대 개국초가 되는데, 온 천지가 뻘밭으로 서서히(약 500년 ~ 약 1,000년 사이) 변해갔으므로 그런 연유로 발해(渤海)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다시말해, 지금 요동반도 대련지구 앞바다는 환인 때 부터 환웅시대 까지 초목이 우거지고 먹거리가 풍부한 신천지 대평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평양(平壤)이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에 발해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는 지질학적 연구 결과가 있으므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관련 논문 :   한중센터  http://www.ckjorc.org/  .  

yellow sea plain.pdf

                비타민 북   http://www.vitamin-book.co.kr

 

 

                              

[출처] 웅상(雄常)과 부상(扶桑)|작성자 bc8937

 


거대 뽕나무 반얀나무가 부상나무?

          

인도보리수(반얀트리,반얀나무,뽕나무)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부근인 히말라야산 기슭의 샤키야족(釋迦族)의 작은 나라의 왕자로 태어난 부처님은 안락하고 행복한 생활을 보내던 중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 모습, 또는 늙고 병들어 죽는 것 등을 보시면서 고(苦)의 본질 추구와 해탈을 구하고자 고민하였다. 29세 때 처자와 왕자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6년간에 걸치는 고행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때 부처님이 도를 깨우친 인도보리수는 아열대 지방에 자라는 뽕나무무리의 무화과 종류에 포함되는 나무로서 높이 30m, 지름이 2m 정도나 되는 큰 상록수이다. 인도가 원산이며 가지가 넓게 뻗어서 한 포기가 작은 숲을 형성할 정도로 무성하게 자란다. 이 나무를 불교에서는 범어로 마음을 깨쳐준다는 뜻의 Bodhidruama라고 하며 Pippala 혹은 Bo라고도 하였는데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한자로 번역할 때 그대로 음역(音譯)하여 보리수라는 이름이 생겼다.

세계의 특이 수종 이야기 2 - 가장 넓은 나무 The Great Banyan

반얀트리는 인도대륙이 자생지인 교목이며, 수관이 매우 넓은 나무로 유명하다. 또한 반얀트리가 가지고 있는 특징 중 하나가 공기뿌리(Arial Roots, 국내에서는 받침뿌리라고도 함)가 많이 자란다는 점이다. 나무의 높은 줄기에서 수염처럼 내려오는 엄청난 양의 공기뿌리 때문에 이 나무는 특별한 영험이 가지는 나무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엄청 무서워 보이기도 한다. 보리수와 더불어 불교 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나무로, 불교경전에 많이 등장하며, 이로 인해 벵골 보리수로 불리기도 한다.

이 공기뿌리가 땅에 닿게 되면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개체(클론, Clone)로 성장하게 된다.

이 클론은 모수와 독립적으로 자라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모수와 연결되어 계속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 밖에도 무화과 속이기 때문에 무화과 열매와 비슷한 열매가 열리게 되는데, 자생지에서는 새들이 이 열매를 먹고 다른 곳에서 배설하여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도 한다.

반얀트리는 인도의 국목(國木)이기도 하다. 특히 인도에서는 이 나무를 신성시하여, 사원을 건립할 때 그 주변에 꼭 식재를 하고 있다. 또한 수관이 매우 넓기 때문에 열대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해주는 나무이기도 하다. 사원은 일반적으로 신도 등의 일반 대중이 많이 모이는 장소이기 때문에 반얀트리가 제공해주는 그늘은 일반인들에게 정신적인 안식을 주는 사원과 같은 휴식을 제공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데로 호텔 및 리조트의 브랜드로 반얀트리를 선택한 것은 방문한 사람에게 그늘과 같은 안식처를 제공해준다는 의미에서 매우 좋은 네이밍이라고 할 수 있다. 

반얀트리는 세계적으로 특이한 수목이 많은데 대부분의 반얀트리의 넓은 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인 인도 콜카다 인근의 Acharya Jagadish Chandra Bose Indian 수목원에 있는 The Great Banyan과 역시 인도의 안드흐라 프라데쉬주(Andhra Pradesh)에 위치한 Thimmamma Marrimanu로 이 나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수관을 가지고 있는 나무라고 한다. 이 밖에도 파키스탄의 가장 큰 나무로 알려진 Midh Ranjha Tree와 인도 방갈로르 지역에 있는 Dodda Alada Mara도 유명한 반얀트리의 일종이다.

 

The Great Banyan
여러 여행기록에 의해 250년 이상 된 것으로 보여지는 The Great Banyan은 한 나무가 약 19000 평방미터(약 6,000평)의 넓이에 퍼져 있는 아주 거대한 나무군이다. 또한 한 나무에 약 4000여개의 뿌리줄기가 내려와 있어 마치 한 숲에서 여러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특이한 나무이다. 이 나무를 보기 위해 방문하는 숫자는 전세계의 어느 식물원보다 방문하는 숫자보다 많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나무는 원래의 나무가 아니다. 1925년 인도에 연속해서 불어 닥친 두개의 사이클론으로 인해 원래의 주나무는 상처를 받게 되어 이로 인해 병원균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 자칫하면 나무 전체가 고사할 수 있어 상처를 입은 주 수간을 잘라내게 되어, 현재 남아있는 수간들은 원래 나무가 아닌 클론개체라고 할 수 있다. 원래의 주 수관이 있던 곳에 기념비를 세웠으나, 접근이 매우 힘들어 실제로 보기는 매우 어렵다고 한다. 이 나무의 둘레에 350m 걸쳐 도로를 건설하였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관이 그 도로를 덮어 현재는 도로가 수관안에 있다. 현재 수관의 둘레는 약 500m, 가장 높은 나무의 수고는 25.4m라고 한다.

Thimmamma Marrimanu
Thimmamma Marrimanu는 인도의  Andhra Pradesh주 Anantapur에 위치에 있는 나무로 현지어로 반얀을 뜻하는 Marri와 수간(Truck)를 의미하는 manu를 뜻하는 말로 이루어져 있다. Thimmamma은 지역의 전설에 의하면 남편의 장례식에서 장작더미에 몸을 던져 자신을 희생한 여성의 이름으로, 이 나무가 그 장작더미 중 하나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이 나무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수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수관의 면적이 19107 ㎡로 거의 2㏊에 달한다. 위에서 소개한 The Great Banyan의 경우도 수관이 매우 크지만, 원래의 개체가 아닌 클론개체만 남아있어 이 나무가 이런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 평균적으로 1㏊당 500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으므로 이 나무는 1000그루의 나무가 차지 할 공간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욕심쟁이 우우훗!!! 어쨌든 이런 이유로 1989년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큰(넓은) 나무로 등재되었다. 

 

반얀트리
한국 전통 신앙 당나무

 

                                                                                        반얀트리

                                                                         한국천통 놀이 

자료 출처 : 나무신문(http://www.imwood.co.kr)

https://blog.naver.com/kgs3540/222243695465